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고시라카와 덴노 (문단 편집) === 전후 부흥과 오슈 캇센 === 지토직 설치 범위나 셋칸케 영지의 분할이 합의되면서, 조정과 막부 사이의 관계는 분지 3년(1187년)이 되자 개선될 조짐을 보였다. 황궁인 간닌의 다이리가 겐랴쿠 2년(1185년)에 대지진으로 파손되자 오에 히로모토(大江広元)가 상경하여 가마쿠라 막부의 전면적인 지원을 받아 수리 작업에 들어갔다(《아즈마카가미》 6월 21일조, 《교쿠요》 7월 14일조). 수리는 10월 25일에 완료되었고(《아즈마카가미》동일조), 11월 13일에 고토바 천황이 이곳으로 옮겨왔다(《교쿠요》 동일조). 이 무렵 교토에서는 떼도적의 출몰이 큰 문제가 되었는데 기존의 게비이시쵸는 이를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고, 고시라카와인은 치안 회복을 위해 교토슈고(京都守護, 경도수호)인 이치조 요시야스(一条能保)에게 >“용사들을 가려, 특별히 경위” 할 것을 명령했다(《아즈마카가미》 8월 12일조). 이에 요시야스의 보고를 접한 [[미나모토노 요리토모]]는 곧 지바 쓰네타네(千葉常胤)와 시모코베 유키히라(下河辺行平)를 교토에 보내어 떼도적 진압의 임무를 맡겼다(《아즈마카가미》 8월 19일조). 이듬해인 분지 4년(1188년) 4월 13일에 인노고쇼·로쿠조도노(六条殿)가 화재로 소실되자(《교쿠요》 동일조, 《아즈마카가미》 4월 20일조) 인의 분고쿠나 구교의 지쿄고쿠, 막부가 분담하여 재건 공사가 시작되었다. 원래의 로쿠조도노는 타이라노 나리타다의 저택으로 다소 비좁았지만 새로 지으면서 더욱 확장되었다. 각지의 농업 생산도 >“올해를 통틀어 제일의 풍작”(《교쿠요》 7월 9일조) 이라고 할 만치 회복될 조짐을 보이면서 황폐화된 교토도 전란과 지진의 타격을 떨쳐내고 차츰 부흥해갔다. 조정과 막부 사이에 남겨진 현안은 [[미나모토노 요시츠네]]의 동향이었다. 분지 4년(1188년) 2월, 요시츠네가 북부 오슈(奥州)에 있음이 확실하다는 정보가 요리토모로부터 조정에 전해졌다(《교쿠요》 2월 13일조). 요리토모는 >“돌아가신 어머니를 위해 5중탑(五重塔)을 지을 것”, “살생을 금지할 것” 등을 이유로 연내에 군사행동을 일으키진 않겠다고 표명하면서, '''[[오슈 후지와라]]''' 가문의 제3대 수장이었던 후지와라노 히데히라(藤原秀衡)의 자식들에게 요시츠네 추토를 명령하는 선지를 내리라고 요청해왔다. 요리토모의 요청을 받아들여 2월과 10월에 후지와라노 모토나리(藤原基成)·야스히라(泰衡)에게 요시츠네 추토를 명령하는 선지가 내려졌다(《아즈마카가미》 4월 9일조, 10월 25일조). 분지 5년(1189년) 윤4월 30일, 요리토모의 압박을 이기지 못하고 제4대 수장 후지와라노 야스히라는 요시츠네를 습격해 자결하게 만들었다. 고시라카와인은 이로써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판단했지만, 요리토모의 목적은 자신의 배후를 위협하는 오슈 후지와라 씨(奥州藤原氏)의 섬멸이었고, 그는 거듭해 야스히라 추토의 선지를 요구했다. 오슈에 대한 대응을 둘러싸고 조정과 막부의 견해가 나뉜 가운데 7월 19일, 요리토모는 기어이 선지도 없이 자신이 친히 200,000명의 대군을 이끌고 오슈로 향했고, 9월에 오슈 후지와라 씨를 멸망시켰다('''오슈 캇센'''). 이것이 조정의 명령도 없는 사전(私戦)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고시라카와인은 7월 19일에 뒤늦게 야스히라 추토의 선지를 내림으로서 요리토모의 군사행동을 추인했다(《아즈마카가미》 9월 9일조).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